행궁동 2

행궁동을 통해 다시 만나는 수원 행궁

 

시간을 거닐다
::수원 행궁동과 화성행궁에서의 하루

햇살이 담장을 넘어오면, 행궁동의 골목도 서서히 깨어난다. 검은 기와지붕 위로 떠오르는 아침 햇살, 잎사귀 사이로 비추는 부드러운 빛은 이 도시가 오래된 시간과 함께 숨 쉬고 있음을 말해준다. 수원 행궁동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 그리고 삶과 예술이 공존하는 살아 있는 골목이다.

 

녹음 사이로 드러나는 고요한 지붕

성곽 아래로 펼쳐진 정원길을 따라 걷다 보면, 수풀 너머로 겹겹이 쌓인 기와지붕이 눈에 들어온다. 조선의 곡선을 따라 흐르는 지붕은 날카롭지도, 장식적이지도 않다. 단지 오랜 시간의 무게를 고요히 품고 있다. 정원은 무성하고 질서 있다. 돌담을 타고 자란 담쟁이넝쿨, 차분히 깎인 수풀, 그리고 그 위로 조심스럽게 내려앉은 나뭇잎 그림자들. 도시 속에서 이만큼 차분한 호흡을 내쉬는 공간이 또 있을까.

 

화성행궁, 조선의 이상을 걷다

행궁동의 중심은 단연 화성행궁이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참배하고 백성과 소통하기 위해 조성한 이 행궁은, 단순한 임시 궁궐이 아니다. 조선 후기의 정치적 실험이자, 정조가 꿈꾼 ‘효와 개혁의 도시’의 상징이었다.

신풍루를 지나 들어서면, 눈앞에 펼쳐지는 전각들이 마치 과거의 시간들을 정연하게 줄 세워 놓은 듯하다. 정조가 직접 머물던 봉수당부터, 어진을 모시던 복내당, 행사와 연회를 위한 장락당까지. 건물 하나하나마다 그 기능이 뚜렷하고, 그 안엔 사람들의 움직임과 시간이 응축되어 있다. 그저 보는 것이 아니라, 걷고 느끼며 참여하는 곳이다.

요즘의 화성행궁은 또 다르다. 곳곳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전통복을 입은 여행자들이 사진을 찍는다. 문화해설사가 이끄는 투어팀이 유려한 설명을 따라 움직이고, 한편에선 고요하게 벤치에 앉아 시간을 음미하는 사람들도 있다. 과거의 권위가 아닌, 현재의 환대가 느껴지는 공간. 그것이 오늘의 화성행궁이다.

 

성곽 위에서 내려다보는 도시

화성행궁을 나와 성곽길을 따라 오르면, 수원화성의 강인한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낸다. 석벽 위로 올라 걷는 순간, 마을의 풍경은 또 다른 층위로 확장된다. 아파트 단지와 기와지붕, 가게 간판과 전통 깃발이 공존하는 이 도시의 단면이 한눈에 들어온다.

어느 모퉁이에서는 두 여인이 사진을 찍고 있다. 큰 나무 그늘 아래서 손짓을 하며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은, 이 성곽이 단지 군사적 기능을 넘어 이제는 일상의 풍경 속에 자리잡았음을 보여준다. 깃발이 펄럭이고, 벽돌 사이로 시간이 흐른다. 그리고 우리는 그 흐름 위를 걷는다.

 

골목의 온기, 마을의 결

성곽 아래로 다시 내려오면, 행궁동의 작은 골목들이 이어진다. 이곳은 유산의 그늘에 머무르지 않고, 창작과 생활의 온기가 스며 있는 거리다. 담벼락에 피어난 담쟁이와 정성스레 다듬은 수풀은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 마을을 사랑해왔는지를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로컬 상점과 갤러리, 공방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전통 한옥을 리모델링한 카페, 도예 작가의 작업실까지. 이곳의 공간들은 단지 소비를 위한 장소가 아니라, 이 골목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철학이 담긴 기억의 집합이다.

 

그리고, 다시 돌아본다

해가 지고, 어둠이 지붕 위를 감쌀 즈음, 나는 다시 행궁 앞에 섰다. 신풍루의 처마 아래로 붉게 물든 하늘이 내려앉고, 성벽 위의 깃발도 조용히 그 자리를 지킨다. 하루 동안 이 마을을 걸으며 과거와 현재, 정적인 유산과 역동적인 일상, 돌과 흙과 나무와 사람을 함께 보았다. 행궁동은 이제 단순한 역사 여행지가 아니다. 역사를 품고 있는 동시에, 내일을 준비하는 마을. 전통의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현재의 감각을 놓치지 않는, 균형 잡힌 도시의 한 귀퉁이.